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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성의 비밀

아인슈타인은 천재?
아인슈타인 사망 이후 지금까지 아인슈타인의 뇌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의 뇌는 일반인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1999년 실비우스 주름 연구 결과를 인용해 아인슈타인의 뇌구조가 일반인과 크게 달라 그의 천재성은 ‘타고난 것’이었다고 아인슈타인을 신격화했다. 하지만 현재 전문가들은 아인슈타인의 뇌가 크게 보면 보통 사람의 뇌와 별반 차이가 없다어 그의 천재성이 보통 사람들보다 특출한 뇌 때문은 아니라고 한다.

결국 아인슈타인의 천재적 발견의 과정은 동시대 과학자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것이 아니었으며, 또 일반인들과 차원이 다른 뛰어난 뇌 덕분도 아니었다. 그가 특수상대성이론을 만드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천재성은 오히려 평범하고 기본적인 것에서 나왔다. 

고집과 끈기의 인물
아인슈타인은 고등학생과 대학생이었을 때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똑똑한 학생도 꼴찌에 가까운 ‘불량학생’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관심분야에 더 생각하고 학문적 역량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던 학생이었다. 특히 한번 생각한 문제는 의문이 풀릴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특수상대성이론도 그렇게 탄생했다. 고등학교 시절 빛과 관련해 갈릴레오의 상대성이론이 잘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 고민의 시작이었다. 이후 그는 푀플이라는 전기공학자가 쓴 ‘맥스웰의 전기이론 입문’이라는 교과서를 읽으면서 도선의 움직임과 자기장의 움직임이 단순한 좌표계의 차이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막상 푀플의 교과서에서 이 ‘사소한’ 문제를 붙들고 고민했던 사람은 당시 아인슈타인이 유일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을 한 뒤 임시직 교사와 실업 상태를 전전하는 힘든 와중에서도 그는 이 문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결국 1904년 말엽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일정한 것이 아니라 관찰자에 따라 달라진다고 가정했을 때 모순이 발생함을 깨닫고 빛의 속도가 어느 경우에나 일정하다고 확신하게 됐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따지자면 10년이 넘게 이런 문제에 골몰해 있던 셈이었다. 그의 이런 놀라운 고집과 끈기가 바로 천재성의 첫번째 비밀인 것이다.

지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선 인물
아인슈타인은 주변의 지적, 인적 네트워크를 충분히 활용해 자신이 궁금해 하던 난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보다 물리학 실험에 몰두하고 추상적인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선호했지만 자신의 지적 호기심과 학문적 탐구를 촉진하는 네트워크를 만들고 이를 잘 유지했던 사람이었다. 이것이 그의 천재성의 두 번째 비밀이다.

그림 아인슈타인이 조직한 ‘올림피아 아카데미’의 멤버들. 왼쪽부터 콘래드 하이히트, 모리스 소로빈, 그리고 아인슈타인. 올림피아 아카데미는 아인슈타인에게 끊임없는 지적 자극을 불어 넣었다.아인슈타인이 고등학교 시절 집에 머물렀던 유태인 의학도 막스 탈미는 그에게 독일 철학자 엠마뉴엘 칸트의 철학을 가르쳤다. 칸트의 철학에 심취한 아인슈타인은 자연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들이 그 뿌리에서는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자연의 단일성을 신봉하고, 이러한 철학적 방법론은 여러 가지 모순적인 현상을 그 근원을 파헤침으로써 해결했던 그의 특수상대성이론 연구에서 뚜렷하게 표출됐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친구가 된 같은 학과의 그로스만, 마리치, 그리고 기계공학을 전공하던 베소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마리치와의 관계는 친구에서 연인으로, 연인에서 부부로 발전했다. 마리치는 아인슈타인이 대학을 졸업하고 1905년에 특수상대성이론을 내놓을 때까지 어려운 기간 동안에 동료로서, 연인과 부인으로서 아인슈타인을 지지하고 자극했다. 

자신의 노트를 빌려줌으로써 아인슈타인의 대학 졸업을 도와 준 그로스만은 나중에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의 수학과 교수가 되어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들 때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등 그의 인생에 결정적 도움을 줬다. 아인슈타인을 특허국에 취직시켜 준 베소는 수시로 아인슈타인의 학문적 고민을 들어주는 든든한 조언자가 됐고, 1905년 5월 어느 날 아인슈타인은 베소와 토론을 하던 중 특수상대성이론을 완성하는 결정적 단서를 포착했다. 

특히 아인슈타인이 조직한 ‘올림피아 아카데미’는 젊은 아인슈타인을 계속 지적으로 자극했다. 대학교수는커녕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조차 없었지만 이들은 모두 당시 물리학을 혁신하겠다는 꿈을 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론에 몰입했고,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논문을 쓸 때마다 그 논문에 대해서도 깊이 논의했다.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하는 인물
1904년 말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항상 일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였지만 ‘왜 빛의 속도는 항상 일정한가’라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모순을 발견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사물로 상황을 바꿔 꾸미는 사고실험을 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추상적인 전자기장 대신 전자석을, 에테르 대신 기계적 진동을 생각했다. 이를 통해 그는 갈릴레오의 상대성이론과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모순 사이에 어느 쪽을 포기할지 고민할 때도 추상적인 시간 대신 시계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도시를 정지해 있는 좌표계로 생각하고 시계로 두 도시, 즉 두 좌표계의 시간을 맞추는 일을 생각했다. 이로부터 그는 특수상대성이론에 도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끌어냈다. 만약 두 좌표계 중 하나가 움직이고 있다면 시계를 어떻게 맞출까?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과학자들은 시간이 운동과는 무관하게 일정한 속도로 흐르는 것이라고 간주했는데, 대체 두 좌표계에서 시간이 같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느 한 좌표계에서 ‘동시’라고 말할 수 있는 사건이 다른 좌표계에서는 ‘동시’가 되지 않는다면?

이처럼 아인슈타인은 시계를 통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시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주목함으로써 자신의 고민을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특수상대성이론을 통해 구체적 사물인 시계와 추상적 개념인 시간이 한 논문에서 결합된 것이다.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시켜 가시화하는 것, 이로부터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결합하는 능력,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의 세 번째 요소다.

고정관념을 버린 인물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유럽의 유수한 물리학자들이 ‘빔과 에테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그 중 유럽 최고의 이론 물리학자로 꼽히던 프랑스의 푸앵카레와 네덜란드의 로렌츠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나오던 1905년 무렵에 아인슈타인과 거의 비슷한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특히 로렌츠는 1895년에 운동하는 물체의 길이가 수축한다는 ‘수축가설’을 주창했으며, 이 수축가설을 통해 빛의 속도가 일정함을 보이는 마이켈슨-몰리의 실험 결과를 설명했다. 마이켈슨-몰리가 더 정확한 실험결과를 내놓자 로렌츠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1904년에 운동하는 좌표계의 시간이 일정치 않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길이가 수축하고 운동하는 좌표계의 시간이 변한다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바로 유도되는 결론들이었다. 

하지만 로렌츠와 아인슈타인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로렌츠는 에테르의 존재를 가정했기 때문에 당시 마이켈슨-몰리의 실험 결과를 설명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는 계속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이론 체계에 새로운 가설들을 자꾸 붙여나갔다. 운동하는 물체의 길이가 수축한다는 가설과 운동하는 좌표계의 시간이 변한다는 가설은 모두 이렇게 도입됐다. 따라서 로렌츠는 운동하는 좌표계의 시간이 변한다는 것이 자연에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실재’가 아니라 단지 ‘수학적 도구’라고 생각했다. 좌표계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다를 수 있다는 결론을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절대공간과 에테르라는 고전물리학의 가설들이 빛의 속도나 전자기유도와 같은 현상에서 모순을 낳고 있다고 판단, 시간의 동시성을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다. 또 절대좌표계를 부정하는 대신 물리량 사이의 관계, 즉 물리 법칙의 절대성이 만족되는 새로운 변환식을 고안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당시 물리학이 직면한 문제점들을 잘 이해했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맥스웰, 마하, 헬름홀츠, 로렌츠, 푸앵카레, 플랑크의 논문과 책을 탐독했지만, 하나의 학설에 교조적으로 매달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결국 그가 특수상대성이론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이론 체계에 대해서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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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총관리자

    등록일2015-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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